실손의료보험(실손보험)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의료기관이 보험사에 직접 제공하는 내용의 보험업 개정안(일명 실손 간소화법)을 두고 병의원 등 요양기관과 보험사의 오랜 갈등이 재점화하는 모양새다.

지난달 15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의결된 실손 간소화법은 실손보험에 가입한 환자가 요청시 병원이 환자의 진료내역 등을 전산으로 직접 보험사에 보내야 하는 것이 골자다. 지난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로 공론화됐으나, 의료계는 보험사에 환자 데이터를 줄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보건의약 4개 단체(대한의사협회‧대한병원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약사회)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 데이터 전송 거부 등 보이콧과 위헌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안은 강성희 진보당 의원을 제외한 여야 합의로 통과됐지만 일부 야당 의원들은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강성희 의원은 이날 전체 회의에서 “실손보험 청구를 위해서 가입자가 낸 서류의 정보를 보험회사가 부당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며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환자 정보가 민영 보험사 이익으로 활용?

의료계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반대하는 주된 이유로는 △민영보험사의 사적(私的) 계약에 관한 사항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요양기관에 그 본연의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민간보험계약 관련 사항에 관해 법적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 △민간보험사 행정 업무를 의료기관에 강제로 전가하는 점이라는 점 △환자 개인정보가 유출될 우려가 있다는 점 △환자의 정보가 민영보험사 이익으로 활용될 위험이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대한개원의협의회는 “재벌 보험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국민을 불행하게 할 수 있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의 심사숙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희흔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가 15일 오후 국회 앞 농성장에서 ‘돈벌이 위한 민간보험사 개인의료정보 전자전송 국회 논의 중단하라!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빙자한 민간보험사 개인의료정보 전자전송 반대한다!’ 기자회견 중 발언하고 있다. / 남기현 기자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공동 성명을 내고 “보험사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을 이용해 환자에게 불리한 보험상품을 만들고, 약점을 잡아 손쉽게 보험금 지급을 거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험사들이 집적된 환자 데이터를 악용해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거나 보험료 인상 등에 활용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급여에 이어 비급여 진료까지 실손보험 전산화로 통제하려 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무상의료운동본부 역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빙자한 개인의료정보의 민간보험사 전자전송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국은 소비자 동의가 없을 경우 업무 외 용도 사용‧보관이 불가하고 위반시 벌칙 조항까지 담겨 있어 의료정보 집적 우려가 과도하다는 입장이다.

◇ 중계기관은 ‘심평원’ 유력 거론…의료계 반발

법이 통과되면 하위법령으로 정하도록 한 중계기관도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실손보험 청구를 전산화하면 병의원을 포함한 10만여 개 요양기관과 20여 개 보험사를 표준전자정보시스템으로 연결하고 운영할 중계기관이 필요해진다.

당초 중계기관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이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의료계의 반대가 극심해 보험개발원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보험회사의 위탁에 따라 보험금 청구를 위한 전산시스템 구축‧운영 사무를 수행하는 전문중계기관으로 심평원이 지정될 경우 비급여 진료비 표준화로 인하여 병원들의 수입이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 탓이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에 의하면 중계기관은 단순 중계역할을 할 뿐 보험금 청구에 대한 심사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2019년 기준 실손보험의 손해율이 130% 수준으로 상승하면서 실손보험에 대한 효율적 관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은 문제로 꼽힌다. 국민건강보험의 급여항목과 달리 비급여 항목은 심평원과 같은 의료행위의 적정성에 대한 공적 통제 장치가 존재하지 않아 과잉 의료가 행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는 이미 청구 절차 ‘간소화’

해외에서는 보험금 청구·지급 서비스와 관련해 △모바일 청구 △의료기관 제휴 간편 청구 △의료기관 직접 청구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절차를 간소화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보험가입자는 의료기관에 진료비를 지불하고, ‘의료기관-건강보험공단-보험회사’간 전자정보전송시스템을 통해 보험금을 청구하며, 건강보험공단이 중계기관 역할을 수행한다.

영국은 의료기관이 보험가입자의 진료 후 ‘의료기관-중간결제회사-보험회사’간 전자정보전송시스템을 통해 보험회사에 보험금을 직접 청구하며, 중간결제회사가 중계기관 역할을 담당한다. 보험회사는 중간결제회사로부터 받은 전자청구서를 심사한 후 의료기관에 보험금을 직접 지급한다.

실손의료보험은 전 국민의 약 75% 이상이 가입하고 있고, 연간 청구액이 1억 건 이상인 점을 고려할 때, 청구 간소화 문제를 의료계와 보험사의 득실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기보다 보험소비자의 이익 등 사회적 편익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전한덕 법학박사는 ‘실손의료보험 청구체계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전문 중계기관 지정, 심평원의 비급여 항목에 대한 심사 강화 등은 병원의 이해관계에 중대한 영향이 있는 민감한 사항들이기 때문에 보완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보험 계약과 의료서비스의 주체인 보험소비자를 중심으로 놓고 봤을 때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다만 의료계와 충분한 사전 협의를 거쳐 신중하게 검토하고 미진한 부분은 보완‧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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